돈 조반니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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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준의 오페라 산책

돈 조반니 IV


장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 통명 몰리에르(Molière)

돈 후안의 전설이 1630년에 수도사 가브리엘 테예스Gabriel Téllez에 의해 작품화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세기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기반으로 유럽의 패권을 장악했다. 16세기에는 아메리카를 침략해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으며, 피사로Pizarro는 168명의 군대로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다른 식민제국을 세움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아마도 스페인 역사의 전성기는 17세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부가 축적된 만큼 상류층을 중심으로 윤리적 타락 또한 심각했을 것이다.
돈 후안의 전설은 아마도 중세 중반기 유행했던 기사들의 연애 문학을 보여준다. 중세 중반기 연애 문학은 기사 계급이 이상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돈 후안의 전설은 이상적 사랑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을 극단으로 보여주고 있었기에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으리라 예상된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기사의 연애담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가브리엘 테예스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중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대중들이 욕망에 빠져 살아간다면 더 이상 신성한 사랑을 숭고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브리엘 테예스의 [세비야의 바람둥이와 석상 손님]은 욕망에 빠진 인간 세상에 대한 신의 경고였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오며 유럽에서 사랑 혁명이 일어나자 돈 후안의 전설은 다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희곡이나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열정적 사랑이 나타내는 인간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돈 후안이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17세기에 돈 후안을 소재로 한 극들이 있었다. 특히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비극이 대세였음에도, 몰리에르Molière 1622~1773가 1665년, [돈 후안 혹은 석상의 잔치Don Juan ou le Festin de Pierr]라는 제목으로 비극이 아닌 희극 작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 후 다양한 장르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1713년에 [석상의 잔치]라는 제목의 희극이 처음 오페라 형태로 만들어졌다. 1761년에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가 만든 발레 [돈 후안]이 빈에서 공연되었고 1787년, 조반니 베르타티Giovanni Bertati의 대본과 주세페 가차니가Giuseppe Gazzaniga가 작곡한 오페라 [돈 조반니 테노리오 혹은 석상]이 함께 베네치아에서 막을 올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이 오페라를 토대로 작곡된 것이다.
1787년,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을 보기 위해 빈에서 프라하로 건너갔다. [피가로의 결혼]은 빈에서와 달리 프라하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모차르트는 다음 시즌에 프라하에서 공연할 새로운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았지만, 그는 [피가로의 결혼] 대본에 만족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그는 로렌초 다 폰테에게 신작 오페라 대본을 의뢰했고 [석상의 만찬] 대본은 4월 초에 모차르트의 손에 들어왔다.

모차르트는 그해 여름까지 작곡을 거의 끝냈으며 9월 초, 미완성의 초고를 들고 두 번째로 프라하를 여행했다. 모차르트는 두섹Dušek에게 교외의 훌륭한 별장 빌라 베르트람카 Villa Bertramka를 받아 좋은 환경 속에서 이 신작을 완성했다.
10월 28일, 하룻밤 사이에 최종 연습으로 진행되던 서곡을 완성했는데, 다음 날이 바로 공연 첫날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돈 조반니]는 10월 29일에 초연을 했다. 원래 계획은 작센 황자皇子의 신혼 축하 공연으로 10월 14일에 초연하려 했으나 가수의 형편과 연습 부족 등의 이유로 이행되지 못해, 그 대신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했다.
[돈 조반니]가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두자 요제프 황제는 칙령勅令으로 1788년 5월 7일부터 빈 공연을 하게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빈 공연을 위해 3곡의 새로운 아리아까지 만들었음에도, 프라하에서의 성공과 달리 단 15회의 공연만을 한 채 실패로 막을 내렸다.
괴테Goethe는 1792년, 바이마르에서의 초연을 본 후 실러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은 둘도 없는 뛰어난 작품이며 모차르트가 죽은 뒤에 이런 오페라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돈 조반니]의 원작자인 몰리에르는 ‘프랑스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은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공연을 금지당했고, 또 다른 작품인 [타르튀프 혹은 위선자Le Tartuffe
ou l’Imposteur]도 성직자의 위선을 폭로하여 반격을 당해 상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몰리에르는 희극을 통해 상류층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했다.

[돈 조반니]와 [돈 후안 혹은 석상의 잔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다르고 인원 수에도 차이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돈 조반니는 미혼인 상태로 바람둥이 생활을 하지만, 몰리에르의 작품에서는 돈 후안과 엘비라가 결혼한 상태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돈 후안이 수녀원에 있던 엘비라를 납치해서 결혼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결혼 역시도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주인공의 성격 설정은 거의 유사하다. 몰리에르는 돈 후안의 대사를 통해서 그의 위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돈 후안 요즘 세상에 위선은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야. 위선은 유행하는 악덕이다.
어떤 악덕이라 해도 유행하기만 하면 미덕으로 간주되지.
선한 사람인 척 연기하는 것은 오늘날 가능한 최고의 배역이야. (중략)
인간의 악덕은 비난받기 마련이고 누구나 소리 높여 공격할 수 있어.
하지만 위선은 특별대우를 받는 악덕이야. 그것 자체로 세상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리고 면책권을 누리게 되거든. (중략)
그들의 간계를 알아차리고 정체를 알아본다 해도 아무 소용없어.
그렇다 해도 그자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으니까.
몰리에르, 《몰리에르 희곡선집》, [동 쥐앙 혹은 석상의 잔치], 242쪽

원작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몰리에르 극에 등장하는 상인 디망쉬 Dimanche다. 극에서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돈이 많은 그는, 어느 날 돈 후안을 찾아가 자신에게 빌린 돈을 갚으라고 말한다. 돈 후안은 입담과 재치로 상황을 잘 모면한다. 이는 당시 베르사유에 있던 귀족들 중에는 상인들에게 돈을 빌릴 정도로 가난하지만, 귀족이라는 허울 속에 갇혀 살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몰리에르는 이와 같은 귀족들의 허상을 비판했다.

글 발행인 박경준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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