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 홍영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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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 홍영후 선생님


이번 호에는 한국 가곡의 효시이자 민족의 노래인 ‘봉선화’를 100년 전인 1920년에 작곡하여 시대의 희노애락과 함께한 작곡가 난파 홍영후 선생님을 소개하고자 한다.

- 난파 홍영후 선생님은 (125년 전)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홍준 선생과 이씨 부인 사이에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심
- 출생 다음 해인 1899년에는 온 가족 서울 정동 14번지 현 예원학교 자리로 이주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부친 홍 준 선생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17년 동안 이웃해 살면서 신약성서를 번역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셨음)
- 12살이 되던 1910년에는 사립 영신(永信)소학교 졸업하고, 그 해 4월 중앙기독청년회(YMCA) 중학 부 입학



- 중학교 2학년이던 1911년 우연히 Violin 연주를 접하게 된 홍난파는 바이올린과 호만(교본)을 구입하여 김인식 선생에게 Lesson을 시작하여 그 해 12 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강당에서 열린 「성탄축하음악회」에 Violin 독주

- 이때부터 음악에 본격적인 뜻을 갖고 15세가 되던 191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에 입학하여 체계적 교육을 받기 시작

- 17세가 되던 1915년에는 조선정악전습소 기악과 졸업하고,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부친이 정혼한 신부 김상운(1898~1926)과 결혼식을 올리는데, 이때 결혼한 첫 부인과는 딸 하나를 두고 11년 후 사별하시게 됨

- 18세가 되던 1916년에는 통속창가집이라는 음악서적을 발행하는데, 이 책에는 홍난파 최초의 작곡으로 알려진 창가 ‘야구전’이 수록(참고로 야구전은 야구경기의 응원가)


- 1917년에는 부친의 강요에 의해 음악공부를 포기하고 친형의 뒤를 이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입학하게 되면서 잠시 외도의 길을 걷게 됨

- 1년 동안 본인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의학을 공부하던 홍난파는 당시 의사로 활동하던 형 홍석후의 막후 지원에 힘입어 세브란스의전을 그만두고 부친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명문 우에노에 있는 동경경음악학교 예과에 입학

- 예과를 마치고 본과에 진학을 하려던 홍난파는 1919년 ‘기미독립만세사건’이 터지자 자신의 Violin을 저당 잡혀 독립운동을 위한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며 삼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됨

- 이 일로 인해 왜경의 추격을 받게 되자 본과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하게 된 홍난파는 나중에 이 일이 학교당국에 알려지게 되어 퇴학이 결정되면서 결국 본과 진학이 좌절되게 됨


- 그 해 난파 선생은 일본에 체류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잡지, 즉 문학·음악·미술 동인지인 ‘삼광’이라는 잡지를 손으로 직접 써 출판함

- 22살이 되던 1920년 홍난파는 한국 최초의 가곡 「애수」를 발표하는데, 이는 그의 단편소설 ‘처녀혼’의 맨 앞에 곡이 수록되어 있음(이 곡이 바로 5년 뒤 김형준 선생에 의해 가사가 붙여져 ‘봉선화’라는 한국 최초의 가곡이 됨)


- 문학에 관심이 많던 난파는 23세가 되던 해에 첫 창작집 「처녀혼」 발표를 시작으로 25세까지 제2, 제3의 창작집 향일초와 폭풍우 지난 뒤 등을 연달아 발표

- 24살이 되던 1922년에는 조카인 홍은유, 홍성유 등과 함께 음악 연구단체인 ‘연악회’를 창설하여 활동을 시작했으며, 1925년 4월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 발행하기도 함


- 그 다음 해인 1926년 9월에는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에 진학하여 음악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1927년부터는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동경심포니오케스트라(NHK)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

- 1929년 31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동요작곡을 시작하여 1933년까지 5년 간 모두 117곡의 동요를 만들었으며, 그 해 9월부터는 조선, 동아일보, 매일신보 등에 서양음악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는 기고 활동에 전념함


- 이후 1930년부터 3년 동안 ‘조선동요백곡집’ 상, 하권과 ‘세계명작가곡선집’을 잇달아 편집 출판하고, 1931년 33세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 Sherwood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음악 이론에 대한 공부를 다시 시작

- 1933년 학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홍난파는 경성보육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실내악단인 ‘난파Trio’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때 봉선화를 제외한 가곡의 대부분이 작곡되기도 했음


- 첫 부인과 사별 후 8년여를 독신으로 생활하던 홍난파는 1934년 36살의 나이에 제자로 만난 소프라노 李大亨과 재혼을 하게 됨. 이후 활발한 연주 및 작품 활동에 전념하던 홍난파에게 수양동우회 사건이 일어남.

- 미국 유학시절 한국학생들이 모여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3․1절 기념식을 열고 만세삼창을 한 것을 일제가 알고 문제 삼은 사건임. 이 사건으로 1937년 6월 홍난파는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등을 겪게 되고 72일 만에 석방되게 됨


-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1937년에는 음악평론 및 산문집 ‘음악만필’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39년 6월에는 국내 최초 관현악 작품 2곡을 발표하고, 7월에는 역시 국내 최초로 교향곡 전 악장을 연주함

- 점차 건강이 나빠지며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치료했던 건성늑막염 재발하고, 여기에 결핵균이 머리에 침투하자 결국 홍난파는 1941년 <8월 30일> 홍파동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하게 됨(유족 이대형 여사, 숙임, 정임 두 딸 남김)


- 돌아가시기 전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해 달라’는 말씀을 남기심

- 이에 따라 가족들은 9월 1일 새문안교회에서 영결예배를 마치고 당시 홍제동 화장장을 거쳐 한 줌의 재로 변한 그의 분골을 한강에 뿌림으로, 평생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과 함께 살아 온 난파 홍영후 선생은 43세의 길지 않은 나이로 일생을 마감하시게 됨


다음 호는 스테이지에서는 우리 가곡과 홍난파 음악을 사랑하며 홍난파 탄생지인 수원과 화성에서 홍난파를 기념하는 사업에 평생 헌신하고 있는 정희준 선생을 만나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의 기념비적 사업인 ‘고향의 봄 꽃동산 사업’과 홍난파 선생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고자 한다.
다시 한번 우리 민족 정서를 담고 있는 우리들의 노래가 만방에 울려 퍼지기를 소원하며..

글 발행인 박경준
편집부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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