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 서거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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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지 푸치니 서거 100주년 커버스토리

자코모 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년 12월 22일~1924년 11월 29일


푸치니는 1858년, 이탈리아 루카에서 태어났다. 베르디와 함께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된다. 아버지 미켈레Michele는 루카에서 작곡, 연주, 교육 등 음악 일을 했지만 푸치니가 5세 때 병사했다. 푸치니는 어릴 때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보인 것도 아니고 학업성적도 좋지 못했다. 어머니는 숙부마저 그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교육에 정성을 기울였다. 푸치니는 어머니의 노력과 격려 및 죽은 아버지의 제자 안젤로니Angeloni의 훌륭한 지도를 받아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16세 때 오르간 경연 대회에서 1위를 한 후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축제에서 피아노를 치며 이때부터 작곡을 조금씩 시작했다. 푸치니는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감동받아 오페라 작곡가가 될 것을 결심했다. 어머니와 큰아버지 등 집안의 도움과 마르게리타 여왕의 장학금을 받아 21세인 1880년에 바라던 밀라노음악학원에 입학해 폰키엘리와 파치니 G. Paccini 1796-1867에게 사사했다.

자동차 광이었던 푸치니와 동료 작곡가와 함께 토레 델 라고 1909 (사진 중앙)

그러나 2년째부터 장학금이 끊겨 가난한 마스카니와 공동생활을 하면서 고학으로 1883년, 24세에 밀라노음악원을 졸업했다. 졸업 작품 [교향적 카프리치오Capriccio Sinfonico)는 매력 있는 역작이라는 호평을 받아 루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곡이 [라보엠 La Boheme]에서도 사용되며 관현악법에도 나중의 작품과 밀접히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푸치니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한 폰키엘리는 시인 폰타나Ferdinando Fontana에게 그를 위한 오페라 대본집필을 부탁해 [지젤]과 같은 제재로 첫 작품 [르 빌리Le Vili)]를 썼다.
비록 공모에서 떨어졌지만 1884년, 밀리노의 달베르메극장에서 공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덕택에 리코르디 출판사와 전속계약을 믿었고 리코르디는 푸치니 작품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푸치니는 2막을 개정해 1885년, 스칼라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작품도 슬프게도 아름다운, 독특하고 매혹적인 선율과 멋진 장면 묘사 덕에 인정을 받았다.

프란케티, 마스카니, 푸치니

두 번째 작품으로 외세의 원작에 입각한 폰타나의 대본으로 [에드가Edgar]를 썼으나, 작곡 도중 어머니와 동생이 죽어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고, 이후 1889년, 스칼라극장에서 상연되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푸치니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결정적으로 지위를 확립한 것은 아베 프레보Abbe Antonie F. Prevost 의 원작에 따른 세 번째 작품 [마농 레스코]다.
여러 대본 작가의 손을 거쳐 1893년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푸치니는 명성을 얻었다. 대본 자체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작곡가로서의 개성이 강하게 나타나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당시 푸치니의 나이는 34세로, 일류 작곡가로서 결코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기본적인 창작 스타일을 확립하고부터 그의 음악적 성장은 눈부셨다.

푸치니는 명작 시대를 맞이한다. 명작 시대는 1896년에 토리노 레지오극장 에서 공연한 작품인 앙리 뮈르제의 원작 [라 보엠]에서 시작한다. 파리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들을 그린 오페라 속에서 당시 관객은 푸치니가 서민이 품는 따뜻한 마음가짐을 알아차림과 특유의 애수감을 띤 매력적인 선율미를 인정하며 그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베르디의 오페라가 많든 적든 정신적인 것을 청중에게 요구하는 데 비해 푸치니의 오페라는 한층 쉽게 작품 속으로 용해되는 오락적인 요소를 강하게 보여준다.

1900년, 푸치니는 [라 보엠]에 이어 사르두victorien Sardou의 희곡 [토스카]를 로마의 콘스탄치극장에서 공연했으나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고 연이어 [나비 부인]1904, [서부의 아가씨]1910 등 대표작을 발표했다. [토스카]와 [나비 부인]의 초연도 실패였지만 해가 갈수록 푸치니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각국의 가극장에서 상연하기에 이르렀다.

[서부의 아가씨]는 진귀하게도 개척 시대의 미국 서부에서 취재한 오페라로, 미국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호평을 받았으나 지금에 와서는 구성에 다소 난점이 있어 상연되는 기회가 적다. 오페라의 주역은 대부분 서민이며 게다 가 여주인공은 관객의 동정을 끌기 쉽도록 비극적인 인물로 설정했다. 비극의 여주인공에게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많은 곡을 부르게 했다. 음악적 측면에서 독특한 점은 특이하고 상냥하며 아름답고 슬픈 선율을 노래에 반영한 것이다.

선율은 푸치니의 것이라고 직감할 만큼 개성적으로 표현했다. 푸치니의 노래는 마스네식의 서정성과 비제와 베르디의 열정, 박력이 더해 져서 극 중 인물의 호흡을 잘 표현한다. 더욱이 사랑을 노래하는 아리아는 관능적이며 매혹적이라 클라이맥스를 이루기도 한다. 푸치니의 관현악은 늘 새롭게 꾸며지며 작품 무대가 되는 지방 민요 등을 섞어 지방색을 살리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의 음악은 절도 있으며 성부에 큰 비중을 둔다. 그러나 관현악에서도 동기를 잘 활용해 어떤 분위기를 자아내어 장면의 효과를 보여주기도 한다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 위에서 가수의 능력을 중분히 살리기 위해 중요한 대목에서는 들 성부의 선율을 두드러지게 해 호소한다. "좋은 대본이 없으면 나의 음악은 쓸모없다"고 말한 것처럼 제재의 선택과 대본 만들기에 아주 열심이어서 자코사와 일리카의 대본으로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 명작을 탄생시켰다.


엘비라 푸치니, 자코모 푸치니, 안토니오 푸치니 1900

푸치니는 신기한 것을 좋아해 새로운 소설이나 연극을 사랑했고 모터보트와 자동차를 수집하는 취미도 있었다. 그는 늘 여자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화려한 옷차림으로 지냈지만, 음악적으로는 새로운 음악을 들고 그 특징을 빈틈없이 자기 작품 속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관객보다 한발 앞서고 있지만 결코 여러 발 앞서지는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너무 앞서가지는 않으려 했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오늘날 세계의 가극장에서 베르디, 바그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연된다. 그러나 푸치니는 베르디나 바그너와 비교할 때 높이와 깊이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베르디 이후의 이탈리아 최대의 오페라 작곡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푸치니는 자신의 말처럼 '극장을 위해 작곡하도록 신의 명령을 받은'사람이다.

오페라 투란도트의 한 장면

60세를 앞둔 1918년도에도 푸치니는 각각 1막으로 된 3부작의 오페라 [외투], [수녀 안젤리카], [잔니 스키키]를 발표하면서 열정을 이어갔다. 중국의 전설을 바탕으로 [투란도트]에 착수했으나 인후암 때문에 66세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인 1924년 11월 29일, 브뤼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미완의 [투란도트]는 제자인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 손에 의해 완성되고, 생전에 푸치니와 친교가 있던 명지휘자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밀라노 스칼라극 장에서 초연되어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다.

발행인 인문학자 박경준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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