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양음악과 홍난파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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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양음악과 홍난파 I


글 양헌 정 희 준
- 前 (사)난파합창단 초대이사장
- 現 (사)한국예술가곡총연합회 명예이사장
- 現 화성시 현근대음악전시관건립추진위원장
- 現 (재)송호.지학장학재단 이사장

1. 음악이란?

① 음악(노래)은 그 기원을 찾는다면 인류 역사가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문화생활 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각 지역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 났을 것 같다. 어머니의 자장가, 집단 노동의 노동요, 사냥꾼의 짐승몰이, 목동들의 풀피리 등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② 그리스 시대는 “뮤즈 여신”이 “리라”나 “플루트”를 들고 나오는 묘사가 있고, 그 유명한 원형 극장에서 그리스 희곡을 공연할 때 합창단의 합창이 공연 됬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역사가 오래된 중국에서, 최초의 국가체제와 법을 제정한 주(周)나라 시대에 제례악(祭禮樂)이 있었고 흙과 광석, 도기, 가죽, 대나무 등으로 만든 악기들이 있었다고 한다.

제5회_궁중문화축전_종묘제례악궁중문화축전_종묘제례악 (제공) 한국문화재재단

③ 그러나 서양음악의 시초는 6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때, 그레고리오 성가집과 성악 교육기관과 성가대 창설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 같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각 지역(동방교회 쪽, 갈리아 지방, 이태리 각지)의 다양한 성가들을 통합하는 노력과 함께 성가대를 운영하고 단원들의 성악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을 찬양(讚揚)하고 신도들을 교화(敎化)하고 전교(傳敎)를 목적으로 하였을 것이나, 교황의 권위와 지배력을 강화하는 목적이 더 컸을 것으로 본다. 서양음악은 교회를 통해 발전해 왔다고 본다.
④ 그 이후, 르네상스기를 지나, 바로크시대 음악, 고전주의 음악, 낭만주의 음악, 인상주의 음악, 현대 음악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는 바로크시대, 고전주의 음악, 낭만주의 음악을 가장 즐기고 있다. 19세기는 음악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의 그레고리오 성가가 담긴 오래된 점진적 책.

⑤ 순수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절대음악이나 작곡자의 의도를 표현한 표제음악등이 있지만, 엄숙한 의식을 치루거나 단결과 용기를 이끌어 내기 위한 목적의 국가(國歌)나 교가(校歌) 군가(軍歌)도 있고, 극적인 흥미를 함께하는 오페라도 있고 환상에 이끌리게 하는 발레곡, 민족정서를 표현하는 민요나 가곡, 동심을 표현하는 동요도 있다. 교회 음악은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확고한 자리를 지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음악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⑥ 인간에게는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있고 이를 성취했을 때 기쁨과 만족감을 얻는다. 아름다운 소리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높은 단계의 만족감, 심리적 카타르시스는 음악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음악이 순수하고 고차원적인 아름다움을 갖출수록 얻어지는 만족감은 크고, 곧 행복감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클래식 음악이라 생각한다. 음악감상은 의학적으로도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여 행복감을 준다고 설명한다.

표제음악의 대표작인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필사본

⑦ 그 이외에, 나라에 따라,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창법에 따라 여러 민족음악과 여러 장르의 음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민요, 국악 등이 있고 최근에는 K-POP, 트롯트 등도 있다. 그러나 이들 음악들은 영원한 예술로 자리매김 하리라고는 볼 수 없다. 지역적, 시대적, 예술성의 한계 때문에 그 인기와 유행은 생명이 길지 못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표현되는 높은 예술성과 전 인류적 전 세계적 보편성을 갖는 클래식 서양음악이 음악의 중심이라 하겠다. 홍난파의 음악관(音樂觀)도 선율과 리듬과 화성을 갖춘 음악이 서양음악이라 보았다.


2. 한국의 서양음악

1) 전래(傳來)

1876년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방 함으로써 외국과의 교류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1882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되자 미국사회에 조선이 알려지게 되고 선교의 대상국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알렌을 선두로 1885년에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뒤를 이었다. 헐버트, 스크랜턴 등도 그때 입국했고, 한국음악의 산실인 숭실학당을 세운 베어드는 그 몇 년 후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물론 선교를 목적으로 들어왔지만 조선의 어려운 시기에, 각 분야 특히 교육, 의료,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큰 공을 세운 외국인이었다.

1916년의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초기에 음악가라 할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김영환, 홍난파 등 모두가 이들 선교사 덕에 음악에 눈을 뜨게 되고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최초의 전문 음악가라 할 홍난파는 물론이려니와 선배라 할 4명의 음악가 역시 기독교인이며 선교사들로부터 음악을 배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4명은 모두 북한 출신이고 새문안교회 교인들 이었다.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할 때 음악과 관련된 휴대품도 가지고 왔다. 찬송가를 비롯하여 운반하기 용이한 하모니카 손풍금 등 그러다가 자리를 잡은 후(교회 설립, 학교 설립)에는 오르간과 코넷(트럼펫과 유사한 금관악기)등 노래를 가르치고 음악교육을 할 수 있는 악기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다.

2) 개화기의 음악교육

고종과 조선 정부는 선교사들의 순수한 선교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교육이나 의료활동을 목적으로 한다고 입국하고, 종교활동은 은밀하게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 여러 차례의 천주교 박해가 있었으며, 1866년도 대동강에서의 제네랄셔먼호 사건,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함대를 보내 군사적 충돌을 일으킨 신미양요(1871년) 등으로 양이(洋夷)에 대해 적대적 감정이 있었고, 일반 백성들 속에서 나쁜 소문이 퍼지는 등 선교하기엔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러다가 갑신정변(1884년)에서 민영익이 큰 부상을 입었는데 알렌 선교사가 치료해 줌을 계기로 고종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하여, 선교의 분위기가 조성되게 되었다. 각지의 많은 선교사들 중 서양음악의 전래와 교육에 업적을 남긴 선교사는 우선 언더우드, 아펜젤러, 베어드. 스크랜턴, 헐버트 등 전술 하였던 선교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서양음악의 산실이라 할 단체와 음악교육에 공이 있는 학교를 소개하겠다.

윌리엄 베어드(배위량)과 부인 애니 베어드

① 숭실학당
미국 선교사 베어드(1862~1931. 한국명 배위량)는 1891년 부산으로 입국하여 부산과 대구에서 큰 선교의 발자취를 남기고, 서울을 거쳐 평양에 들어가 1897년 숭실학당을 설립하고, 성경, 한문, 수학, 음악, 체조를 가르쳤다. 1897년 10월 베어드는 평양의 신양리(병인양요 때 기독교인의 순교지)에 13명의 학생으로 숭실학당을 시작한다. 1900년도에는 4년제 중학교를, 1905년 부터는 대학교육을 하게된다. 1906년 부터는 음악교육을 실시하였고 그 이후, 음악전공 선교사들 모우리 박사와 말스베리 등이 음악교육을 함으로써 우리나라 서양음악사에 큰 업적을 남기게 된다.우리음악의 선구자인 김인식, 김영환, 김형준 뿐 아니라 박태준, 현제명, 안익태, 김세형, 김동진 등과 그 이후로는 박태현, 이인범, 임만섭, 전봉초 등이 숭실이 낳은 음악가들이다. 대구 계성학교 선후배인 박태준(1900년생), 현제명(1902년생)등이 서울로 유학을 오지 않고, 평양의 숭실대학으로 유학 간 것을 보면, 당대에도 숭실대학의 음악교육이 널리 알려진 듯하다. 음악가들의 배출 이외에도 숭실학교는 애국자 양성소로, 많은 애국지사와 문인들과 목사들을 배출하였다.

초창기 숭실학당

②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와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최초의 민간 음악기관으로 1909년도에 조양구락부가 탄생하였다. 일제 침략기의 혼란속에서 전통음악을 유지, 보존하자는 취지로 설립되어 황실의 도움도 있었으나 2년의 단명으로 끝나고, 그 후신으로 1911년에 조선정악전습소가 뒤를 잇는다. 조선 정악전습소는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를 두고 서양악과에는 성악과 기악과 악리과(樂理科)가 있었다. 초대 서양악과 교사는 숭실학교 출신의 김인식이고, 이상준과 홍영후(홍난파)를 가르쳤고, 홍난파는 이때 처음으로 그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움으로 우리 음악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홍난파는 이곳에서 성악과 1년, 기악과 1년을 이수했으며 졸업 후 바로 후배를 가르치게 된다. 하지만 조선정악전습소 또한 경제적 이유로 1914년 3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

조선(옛 한국)에 H. Underwood가 지은 새 인사 교회

③ 새문안교회
1885년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원 설립을 시작으로 활동을 시작, 1887년 9월 새문안교회를 설립, 그 이후로 1895년, 1910년 교회를 신축 이전하면서 큰 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외관만 커지는 것은 물론 아니었으며, 신자수가 늘고 교회행정과 교육, 선교, 사회적 역할등도 거듭 발전하는 가운데 한국 근대 서양음악 발전에도 큰 공헌을 하게된다.

첫째 :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찬양을 위해서 한국 최초의 오선보 악보의 찬송가집 “찬양가”가 1894년 발간 되었다. 이는 근대 한국 음악사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침으로써 2011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제 제478호로 지정되었다. 대부분의 찬송가는 언더우드가 번역하였다.

둘째 :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1913년 이전부터 새문안교회 합창단이 활동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서양음악의 선구자들인 김인식(지휘자), 이상준, 김형준, 김영환(반주자), 홍영후(홍난파) 뿐 아니라 김원복(피아니스트), 홍성유(바이올리니스트), 독고성 등이 단원이었다. 새문안교회는 음악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으로 1913년 새문안 관현악대도 조직하였다.

셋째 : 새문안교회는 난파 홍영후를 지원,
음악교육의 산실인 연악회(1922년)를 설립하고 교회 내에 별도 건물을 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음악을 연구하고 보급하여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1925년에는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音樂界)를 창간 하기도 하였다.또한 1929년 홍난파의 “조선동요100곡집”을 연악회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현재도 “음악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난파 홍영후

④ 양악대와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
1897년 8월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고종도 왕에서 황제로 등극하는 광무개혁을 이루었다. 황제는 황제의 권위를 제고하기 위해 1900년 12월에 신식군대 내에 군악대를 창설하고, 교육과 지휘를 위해 독일 출신 음악가인 에케르트를 초빙하였다. 에케르트는 일본에서의 오랜 경험을 살려 1901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황실 행사때는 물론 시민을 위한 공개 연주회도 하였으며 짧은 존립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많은 인재를 키웠음은 물론, 서양 악기들을 수입하고 연주하는 방법 뿐 아니라 음악교육 일반에 걸쳐 수준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양악대에 대한 홍난파의 평가를 소개하겠다. ⌜...양악이 조선에 들어 온 지도 벌써 반세기가넘었다고 하지만은 그러나 서양 선교사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던 찬미가류를 제외한다면 본격적으로 양악을 수입한 것은 광무년대에 구한국 육군악대의 창설을 이의 효시로 볼 밖에 없는 것이다...⌟(1939년8월1일자 잡지“조광”) 한때는 100여명의 단원들이 있었으며, 양악대 출신 백용우, 정사인 등, 음악가 이외에도 많은 단원들이 군악대 해체이후에 여러 음악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

⑤ 이화학당과 연희전문
미국 여성선교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 : 의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의 어머니) 부인은 1886년 조선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함으로써 최초의 여학교가 탄생하였다. 1년 전인 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세운 명문사학이 탄생한 것이다. 이 두학교는 고종이 학교명을 작명하고 사액(賜額)할 정도로 큰 관심을 가진 학교로 시작했으나, 고루한 유교정신이 지배하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시작은 쉽지 않았다. 이러한 미션스쿨에서는 교육과목에 음악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이화학당은 1910년 대학과(大學科) 설치와 동시에 음악을 정규과목으로 가르쳤다. 이화학당의 대학과는 1925년 일제의 학제에 따라 ”이화여자 전문학교“라 하였고 이때 음악과가 설치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 수준의 음악과였고, 1945년 해방 때까지 대학과정에서 유일한 음악과로써 피아노 전공, 성악 전공, 작곡 전공 순으로 확대되었다. 김애식, 윤성덕, 추애경 등이 1세대라면 채선엽, 김자경, 김순애 등이 다음 세대의 대표 음악가들이다. 연희전문 또한, 미션스쿨이라 음악교육을 하였고 음악 활동도 대단했다.(밴드부, 합창단, 관현악단) 김영환, 현제명 등 선구자격 음악가들이 음악 지도를 하였으나, 일제는 음악과 개설을 허용하지 않았다. 학과만 없었을 뿐 다른 학과의 교과목으로, 또는 특별 활동 등으로 음악교육을 함으로써 안기영, 독고선, 이인선, 김성태, 김생려, 이인범, 김연준, 정희석, 변훈 등의 음악가들을 배출하였다.

이화학당


출처 경기 53회 회보-음악가산책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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