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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영방송 KBS가 광복절 편성한 첫 프로그램이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다.
이 영상을 내보낸 후 광복절에 적절한 편성이었는지 큰 논란이 되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는 어떤 이유로 푸치니 오페라에 등장하였는지 알아보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삽입된 이유는 주로 당시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오페라는 1904년에 초연되었으며, 배경은 1895년 청일 전쟁 무렵 일본의 나가사키이며 푸치니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 했다.
전설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나비부인 역
이를 위해 일본 민요와 군가, 그리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포함한 다양한 일본 음악적 요소를 가미했다.기미가요가 등장하는 장면은 몰락한 양반집 규수인 열다섯 살 일본 소녀 초초상(나비부인)이 게이샤가 되어 미 해군 장교 핀커톤과 결혼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기미가요(일본의 국가)의 일부가 들리고 관리와 친척들이 등장한다. 기미가요는 그들을 나타내는 선율로 일본 전통 혼례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푸치니는 이를 통해 일본의 문화적 배경을 더욱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푸치니 오페라의 마담 버터플라이 역으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미우라 다마키의 동상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글로버 정원
어떻게 서양 음악으로 동양적인 감정 표현을 그렇게 예리하게 했을까?
바로 푸치니의 뛰어난 통찰력 때문일 것이다. 푸치니는 일본을 소재로 “나비부인”을 비롯하여, 미국을 소재로 “서부의 아가씨”를 중국을 소재로 “투란도트”를 작곡하였다.
18세기부터 유럽에는 신비스럽고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꿈의 나라' 동양에 관한 관심은 병적으로 높았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 영국의 인도 식민지 원정, 오세아니아 탐험 등은 동양의 신비주의를 확산시켰다.
오페라 페스티벌 오페라 나비부인의 주인공인 테너 이승묵 소프라노 임세경
중국 열병은 이국적인 풍습, 종교, 철학, 도자기 도입 등에 대한 열풍으로 이어졌다. 특히 중국산 도자기는 값비싼 수입품으로 '하얀 황금'으로 불렸다. 왕실과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품으로 인기를 누렸다.
19세기 중, 후반 유럽에서는 일본을 동경하고 일본 미술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55년 만국 박람회에 일본의 채색화가 및 화가들의 전시를 필두로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일본 채색판화(우키요에)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일본풍의 사조를 지칭하는 자포니즘(Japonism)’이 생겨났다. 일본에 대한 단순한 동경이 아닌 새로운 미술사적 사조로 평가를 받는다. 이 현상은 푸치니가 일본 음악적 요소를 많이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클로드 모네-마담 모네 의상을 입은 Japonais
또한, 이 오페라 1막에서는 미국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도 차용되었다. 이는 미국 남성으로 남성성을 강조하는 핀커톤의 쾌활한 성격과 여주인공이나 현지처인 초초상의 우울감과 대비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핀커톤은 나가사끼 항구가 보이는 집에서“이 집을 999년간 빌렸는데. 계약 변경은 자기 마음대로라고 말하고 아메리카여 영원하라”라며 노래한다. 이때 관현악이 힘차게 미국 국가를 연주한다. 그는 미국의 강대국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세계 각국에 현지처를 두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미국의 힘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나비부인은 서양 남성과 동양 여성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당대 서양과 동양 간의 복잡한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비암 쇼의 나비부인 1910
기미가요는 일본의 국가이다. 정부는 1888년에 에케르트의 "기미가요"를 국가로 공식 채택하여 1888년(메이지 21년)에 해군성은 금관악대를 위한 악보를 인쇄하여 관청과 조약국에 공식적으로 배포했다.
공교롭게도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2~1916)는 대한제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897년 8월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고종도 왕에서 황제로 등극하는 광무개혁을 이루었다. 황제는 황제의 권위를 제고하기 위해 1900년 12월에 신식군대 내에 군악대를 창설하고, 교육과 지휘를 위해 독일 출신 음악가인 에케르트를 초빙하였다. 에케르트는 일본에서의 오랜 경험을 살려 1901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황실 행사 때는 물론 시민을 위한 공개 연주회도 하였으며 짧은 존립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88년(메이지 21년)에 해군성은 금관악대를 위한 악보를 인쇄하여 관청과 조약국에 공식적으로 배포했다. 제목 "JAPAN ISCHE HYMNE", 작곡가의 이름과 소속 "Nach einer altjapanischer Melodie"는 고대 일본 민요를 기반으로 했다는 의미이다. "F.ECKERT, Kongl.Pr.Musikdirektor" 등이 인쇄되어 있으며, 작곡 연도 "1888"이 하단에 인쇄되어 있다. 현재 궁내청에 보관되어 있는 에케르트의 사인 악보에 1880.10.26이라는 날짜가 명확히 적혀 있다.
발행인
오페라 인문학자 박경준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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