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서양음악과 홍난파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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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양음악과 홍난파 I

글 양헌 정 희 준
- 前 (사)난파합창단 초대이사장
- 現 (사)한국예술가곡총연합회 명예이사장
- 現 화성시 현근대음악전시관건립추진위원장
- 現 (재)송호.지학장학재단 이사장

3. 음악의 선구자들
스테이지 37호에서와 같이 개화기에 선교사들에 의한 음악보급과, 숭실학당을 통한 음악교육의 덕택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선구자적 음악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김영환, 홍영후(난파)등이 그들이다.

* 김인식 : 1885년도에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가이자 음악교육자이었다. 전술하였듯이 평양 숭실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성악, 오르간, 음악이론 등을 배웠으며 상동청년학원, 조양구락부, 조선정악전습소, 휘문, 진명, 배재, 중앙 중학교등에서 음악교사를 하는 동안, 이상준과 홍난파를 가르친 음악의 선구자 교사였다. 특히 홍난파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또한 창작음악(창가)의 효시라할 ”학도가“를 작사, 작곡하였다. 많은 합창단(새문안찬양대, YMCA합창단, 경성합창단)을 지휘하였다.


*이상준 : 1884년생인 이상준은 나이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김인식으로부터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서양음악을 배운 후, 그 또한 스승을 따라 휘문, 중앙, 보성, 숙명, 진명 등 명문 사학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여러 곡의 창가도 작곡하였다.

*홍난파 : 홍난파 또한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김인식으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특히 바이올린은 처음 배웠다. 홍난파는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은 최초의 프로 음악가로써, 그에 대해서는 다음회에 상술하겠습니다.

*김영환 : 1893년 평양출생인 김영환은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음악을 배우다가 동경의 우에노(上野) 본과에 유학을 하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음악대학 출신이자 최초의 피아니스트, 최초의 피아노 소유자로 유명하다. 1918년 귀국 후 장안의 모든 음악회에 출연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며 여러곡의 서양음악을 우리말로 번역 하기도 하였다. 정규음악과가 없던 연희전문에서 음악부장으로 많은 후학들을 키워냈다. 이애내, 김원복 등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제자다. *

*김형준 : 1885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한 그는 숭실학교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국악을 공부하였다. 새문안교회에서 코넷과 클라리넷 연주도 하였고 성악가로도 활동하였고, 오랫동안 음악교사를 하였다. 특히 그는 홍난파의 기악곡인 ”애수“에 가사를 입혀,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봉선화“를 탄생시켰다. 작년(2020년)이 우리가곡 100주년 이었는데 이는 봉선화 작곡년대를 기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김원복은 그의 딸이다


3. 홍난파 (洪蘭坡)

음악의 선구자들로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김영환 등을 홍난파와 함께 열거하였다. 하지만, 진짜 서양음악의 선구자는 홍난파라 하는데는 거의 이의가 없다고 본다. 홍난파 이외의 상술한 몇 몇 분은 당대 또는 1,2년 앞서 음악교육을 받은 분들이지만, 교육 정도, 수준, 활동, 업적, 영향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로 홍난파에 이르지 못한다. 홍난파에 이르러 비로서 프로(Professional)음악가라 칭할 수 있음에, 그를 선구자라고 보는 것이다.
그를 알고 이해하는데 쉽도록 ①가족사(家族史) ②교육 ③음악활동과 업적 ④미국유학 ⑤귀국후 활동 ⑥많은 연주 ⑦친일시비 순으로 기술할까 한다.

①가족사(家族史)홍난파의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蘭坡란 1917년에 지은 아호이다) 남양홍씨 토홍 대호군공파 (南陽洪氏 土洪 大護軍公派) 24세 손으로, 아버지 준(埻)의 차남으로, 현 행정구역상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활초리 283번지, 현 홍난파길32) 1898년 4월 10일에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상경시기에 대하여는 2살에서 부터 5살 등, 설(說)이 많지만, 증거할 만한 서류는 없고 활초리 현지에 살던 노인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며 나 역시 오래전 그들의 증언을 청취한 바 있으나 그들의 기억이 정확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한 주장은 2살 때인 것으로 추측한다. 홍준(홍난파의 父, 洪埻 1858년생)이 가족과 함께 상경후 첫 거주지는 정동 14번지였고, 직업은 궁내부(宮內府) 소속 외국어 교육기관의 교육을 거쳐, 번역과의 번역관보(繙譯官補)로 임용된 적이 1900년이기 때문이다.


상경과 그 후의 여러면에서 7촌 조카인 홍정후(洪正厚)의 도움을 받았던 듯하다. (홍정후는 1867년생. 홍준보다 9살 아래로써 새문안교회가 생기고, 첫 번째 교회 신축 때 감독을 할 정도로 언더우드의 신임을 받은 원로 교인이었다.)
온 식구가 새문안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홍준은 선교사 언더우드의 성경과 찬송가 번역 사업을 돕고, 우리말을 가르쳤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정동 13번지에 살았다. 이웃이다.)홍난파의 유년기와 성장기는 새문안교회와 아주 밀접한 생활이었다. 이후 홍난파 가족은 창성동 149번지로 이사하고, 홍난파가 분가할 때까지 18년간을 살게 된다. 홍난파 가족의 호적은 최초로 창성동 149번지에서, 홍난파의 조부 홍대구(洪大九)의 사망으로 인한 사망신고를 계기로 부친 홍준이 호주가 된 사실이 등재되면서 발견됐다.

이 호적등본에 의하면, 대정 8년 4월25일 (1919년) 정동 14번지에서 이거(移居)라고 기록되어, 홍난파가 정동에 살은 기간은 약 19년으로 추측된다. 아버지 홍준(1858년생)은 부인 이씨와 박씨 사이에서 아들 넷 딸 넷을 두었는데 족보상에는 아들 석후 (1883년생) 영후, 계후, 민후가 올라 있고, 큰형 석후의 아들 재유(1903년생)와 성유(1908년생)는 조카이지만 난파와 함께 많은 음악 활동을 하였다. 홍난파는 1916년 김상운과 결혼 후 그와 사이에서 홍숙임, 딸 하나를 두게 되고, 그가 1926년 사망함으로 인하여, 이대형과 재혼하고 (1934.12.27.) 그와의 사이에서 홍정임 (미국 거주)을 두었다. 재혼 후 홍난파는 홍파동 2-16번지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약 17년을 이곳에서 (창성동 149번지) 살았으며 이 동안이 가장 많은 음악 활동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홍난파가옥

이때 이웃에 살던 선배 김형준의 “봉선화” 시를 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 “봉선화”가 작곡되었다. 이대형과 결혼한 홍난파는 홍파동 2-16, 현 “홍난파가옥” (등록문화재90호, 근대문화유산)에서 1941년 작고할 때까지 살았다. 홍난파는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 종로 경찰서에서 72일간 고문받은 후, 늑막염의 재발로 인해, 서대문 적십자 병원과 청량리 경성요양원(현 삼육재단 서울병원) 등에서 몇 년간 치료를 받았으나,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택에서(현 “홍난파가옥”) 8월 30일 영면하였다. 그의 유언대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들으면서 운명하였고, 연미복을 입혀, 새문안교회에서 9월1일 영결식 후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큰 사위 주관으로 한강(漢江) 배위에서 유골을 뿌리는 것으로 장례를 치뤘다. 묘소도 묘비도 없이 천재 음악가는 그렇게 영면에 들었다 (가족들 증언)

홍난파생가경기도지사 남봉진 고증, 복원 (1970년 10월 13일)


스테이지 발행인
buon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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